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흐단 흐멜니츠키 (문단 편집) === 봉기 배경 === 흐멜니츠키가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킬 당시 [[루테니아]] 주민들은 대부분 정교회 신자였으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폴란드 국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정교회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가장 높은 액수의 상납금을 내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을 수여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교회 성직자들이 가톨릭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폴란드인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테니아인 지주들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의 농노들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착취하여 원성을 듣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흑토(Чернозём, 체르노좀) 지대는 평야 지대의 특성상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고, 이 때문에 [[크림 칸국]]의 크림 타타르인으로부터 정기적인 침략을 받고 있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코사크가 내습하는 타타르군을 지속적으로 격퇴하면서 타타르의 약탈 원정은 어느정도 가라앉게 되었다.[* 여기서 코사크가 농노를 보호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케바케]].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기는 했겠지만 봉건영주가 자기 소유의 농노 보호한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원래 코사크가 황량한 초원에서 살아가는 무법자 집단인만큼 다른 집단을 보호할 여유도 없거니와, 실제로는 민족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팔아다 타타르에게 노예로 팔아치우는 '''노예무역의 중개자''' 역할을 맡은 경우가 더 많았다. 당장 이 항목의 흐멜니츠키를 두고 동포를 타타르인에게 넘긴다고 원망하는 '''우크라이나 민요'''가 있었을 정도다. 즉 코사크는 힘의 공백으로 생긴 무법지대에서 필요하면 목숨걸고 싸우던 과거의 원수와도 같은 편에 서서 동포도 팔아넘겼고, 수호자로 군림하면서도 압제자이자 폭군으로 돌변하기도 했던 노회하고 냉혹한 군벌들이었다. ] 서유럽에 산업의 발전이 늦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서유럽에 곡물을 비롯한 식량과 목재를 수출하고 공산품, 생필품과 원자재를 수입하는 경제 시스템을 가졌고, 그러므로 폴란드 귀족들은 원래 폴란드 왕국에 속한 농노들을 가혹하게 착취할 뿐만 아니라 흑토 지대에도 농노제를 도입(=코사크의 농노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코사크를 야만인 정교도라고 멸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반독립적 군벌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실제로 코사크는 [[크림 칸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주변국과 알아서 교섭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농노제 도입은 이런 군벌의 발전을 막으려는 시도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절반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떨어져나가는 대참사로 끝났다. --혹 떼려다 혹 붙이기--] 당시 폴란드는 크림 칸국 외에도 루스 차르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이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와 힘을 합칠까 두려워 [[루블린 조약]]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정교도들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만들 목적으로, [[르비우]] 시내 부유하고 교육받은 정교도 시민들로 구성된 '르비우 형제단'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르비우 형제단 전원을 르비우 시에서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정교회 성직자들을 포섭하여 1596년 새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만들어냈다. 이후 르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정착하자 상당수의 폴란드 [[슐라흐타]](Szlachta, 귀족계급)들은 정교회 신자 다수에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무리한 정책을 밀어부쳤다. 이 정책은 폴란드의 동부 변경 지역을 [[크림 칸국]]으로부터 방어하던 코사크의 대대적인 반발에 직면했다. 근본적인 봉기 배경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교도 억압 정책이었다. 일부 코사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조세 증대 및 권리 축소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자 폴란드의 헤트만 미코와이 포토츠키(Mikołaj Potocki)는 봉기에 연루된 주민들을 오스만 제국 방식을 모방하여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형벌을 시행했으며, 자포리자(자포로제) 코사크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우크라이나 내 주요 방어 거점에 용병들을 주둔시켰다. 이 용병들이 월급이 밀릴 때마다 우크라이나 촌락들을 약탈했던 것은 덤이었다. '등록 코사크'들은 자치권을 상실한 채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폴란드 슐라흐타 지휘관들에게 복종해야 했다. '등록 제외 코사크'들은 일반 농노들과 마찬가지로 농노 신분의 모든 부담을 맡았으며, 유대인들이 토지 관리인으로 부임해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코자키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에게 직접 찾아가서 포토츠키 장군이 축소시킨 코사크의 권리를 복원시켜 달라며 탄원하였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교도 억압과 농노제 확대 및 강화는 그동안 같은 정교도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겹치는 부분도, 동류의식도 없던 정교도 농민과 코사크가 후일 흐멜니츠키 봉기에서 서로 연합하는데 일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